세계의 등반가들
빌헬름 벨첸바하
1900년에 태어난 독일의 뮌헨파 산악인의 한 사람이다. 한스뒬퍼가 조안한 기존의 난이등급에 6등급을 추가하고 그 적용범위를 규명하여 난이등급을 완성하였다.
1925년 당데랑 북벽을 초등하였고 1929년 낭가파르밧 원정계획이 무산되고, 1934년 제2차낭가파르밧 원정대의 부대장으로 참가하여 눈보라 속에서 사망한 그는 학구파 산악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그랑알피니즘 실천가의 한사람이다.

에밀리오 코미치
1900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출신으로 인공등반을 창안해 낸 인물로서 돌로미테에서 활동하며 200여 개의 루트를 개척해 6급등반시대의 막을 여는 데 큰 공헌을 하였고 특히 1933년 치마그란데 북벽초등반은 알프스 북벽등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단독등반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등주의를 주창하기도 했다.
1940년 등산학교 수련생과 훈련등반을 하던 중 로프의 절단으로 사망하였다.

안데를 헤크마이어
1906년 독일의 뮌헨에서 출생하였으며 1930년대 활약한 뮌헨파의 일원으로 선구적 등반가 중의 하나이다.
1932년 그량샤르모 북벽 직등루트를 등반한 불세출의 등반가이다.
그가 유명하게 된 계기는 1938년 카스파레크, 하러 등과 함께 아이거 북벽을 초등반이었다. 저서로 '알프스의 3대 북벽'(Les Trois Dernier Problems Des Alpes)이 있다.

리카르도 카신
1909년에 출생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등반가로 서부알프스와 돌로미테 등지에서 암벽등반의 6급시대를 여는데 공헌하였다.
1935년 치마오베스트 북벽과 피즈바딜레 북동벽을 초등한 그의 최대업적으로 1938년 한 번의 시도로 그랑드조라스의 워커릉을 대장과, 1969년 안데스의 히리샹카를 등정하기도 한 그는 1974년 로체남벽의 원정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가스똥 레뷔파

생각해 보면 등산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산정의 아름다움, 위대한 공간 속의 자유도 다시발견한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도
이 모든 것이 진정한 산친구의 우정없이는 무미건조한 것이다

산들은 하나의 다른세계이다.
지구의 일부라기 보다는 동떨어져 독립된 신비의 왕국인 것이다.
이 왕국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다.

알프스의 위대한 별 가스똥 레뷔파는 1921년에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나 니스의 해벽 칼랑크에서 등반을 시작하여 1942년 등산안내인이 되었고 1946년 샤모니 안내인 협회의 공식인정을 받았다.
1945년에 그랑드조라스의 워커릉, 1949년 피즈바딜레, 1952년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였다. 그는 등반활동 외에도 저술과 영화제작에 몰두하여 전 생애에 걸쳐 11권의 저술과 4편의 등산영화를 남겨놓아 등산을 문화로 승화시켰다.
2차세계 대전 후 루이라슈날, 리오넬 테레이와 함께 프랑스의 3대등산가로 꼽힌다.

헤르만 불
1924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8,000m급을 단독등정했으며 슈퍼알피니즘의 기수로 지칭된다.
1953년 독일, 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참가하여 고소캠프에서 공격 중 기상악화로 철수를 명령받자 이를 거부하고 정상공격을 감행해 낭가파르밧을 등정하고 41시간만에 귀환했는데 극심한 고행으로 출발때에는 29세의 청년의 얼굴이 노인의 얼굴로 변해버렸다.
1957년에는 브르도피크 원정대를 조직하여 소수의 대원전원이 초등하는 개가를 올렸다.
1957년에 초골리사의 정상능선을 안개속에서 하산하다 눈처마에서 추락, 사망했다.
저서로 '8,000m 위와 아래'(8,000 Daruber und Darunter)가 있다.

르네 드메종
1928년 프랑스 남부의 외딴지방 페리고에서 출생했다. 첫산행은 도피네의 로셰브룬에서 비롯하였는데 그 후 1957년 드류서벽을 동계초등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그랑드조라스 워커스퍼를 동계2등하였고 에귀유베르트의 낭불랑슈 벽을 동계에 초등하는 업적을 쌓았다.
특히 1971년 게오르규 구솔트와 그랑드조라스 동계등반 도중 시신을 지킨 채 사흘을 버티다 구조되어 알프스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클라이머는 행복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등반하기 전의 기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고 두번 째는 루트를 오르는 행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회상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피에르 마조
프랑스의 명문 소르본느 대학 출신의 법조계 인사 중 프랑스 산악계에서도 손을 꼽는 명사 피에르 마조는 국회의원을 수년간 지냈고 청소년 스포츠 장관도 여러해 동안 역임했다.
1928년에 태어나 대학에서 법률을 강의하는 한편 제2의 생활인 그랑알피니즘의 구현을 꿈구며 그것을 구현하는데 몰두했으며 1964년 그랑드조라스의 워커스퍼를 12시간만에 등정하기도 했다. 1986년 48세의 나이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여 프랑스 국민의 추앙을 받기도 했다.

발터 보나티
1930년에 태어난 이탈리아 산악인으로 그랑카푸셍 등반에 두 차례 실패한 후 1951년에 초등에 성공하였다.
이 등반은 단독인공등반 방식을 서부알프스에 최초로 도입하였고 이어 1953년 드류의 남서필라를 볼트도 사용하지 않고 단독등반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3년 그랑드조라스의 워커스퍼를 동계초등하였으며 K2의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험기록을 집필하는 언론인이 되었고 장비제작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나의 산으로'(La mes montagne)가 있다.

쿠르트 딤베르거
1930년 오스트리아의 카린티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매일 문턱에 손가락을 걸고 20여회씩 턱걸이 훈련을 할정도로 암벽등반에 열중했다.
1952년에 33시간에 걸쳐 아이거를 올랐으며, 1986년까지 팔천미터급 6개봉을 등정한 그를 가리켜 현대알피니즘에서는 50년대 초 이미 슈퍼알피니즘을 잉태하고 그 가교역할을 해나가고 있는 고독한 용장이라고 부른다.

크리스 보닝턴
1934년에 태어난 영국의 대표적 리더형 산악인으로 영국산악인의 자존심이다. 영국과 알프스는 물론 히말라야 원정등반에도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 현재 영국등반가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다.
1957년 영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드류의 보나티 필라를 오르고 치마그란데를 직등한 이래 두 차례의 실패 끝에 1966년 아이거북벽을 등정하였다. 1975년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의 대장으로 더그스코트와 두갈 해스턴, 피터보드맨이 세계초등에 성공한다.
후에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통한 초등을 시도했으나 조 테스커와 피터 보드맨이 두 명 모두 피로로 정상에 이르지 못하고 동사하게 된다. 사진기자 겸 기자생활을 하기 했으며 저서로는 '나의 선택'(I choose to climb)이 있다.

존 하린
1934년 미국의 캔자스 시티에서 출생했다. 요세미테 계곡에서 단련한 등반기술을 유럽의 암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1965년 로열 로빈스와 함께 1000m가 넘는 암벽의 길을 여는데 그 기술을 적용하기도 했다.
1966년 아이거의 직등을 결심하고 영,미대와 독일대가 함께 등반을 개시하여 하얀거미 아래부분까지 오르다가 로프사고로 1,500미터 이상을 추락 사망했다.

이본 취나드
1938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등반가이며 등반장비를 제작하기도 하는 사업가이다.
1957년부터 장비제작을 시작하여 너트사용을 역설하였으며 요세미테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서부암장에서 활동하였다.
미군으로 우리나라에 근무하던 1965년에 인수봉에 취나드A, 취나드B의 두 코스를 개척하여 우리나라 산악인의 귀에 익은 인물이다.

더그 스코트
1941년 영국의 노팅검에서 출생해 인공등반의 빅월클라이밍을 영국에 도입하여 직접보급해 나가는 가운데 그 방면의 선두주자로 인정을 받았다.
초등보다는 오르는 행위의 순수성을 주장하고 등정지상주의를 멀리하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는 그는 한국의 산악인이 초등한 바인타브락II의 주봉을 초등해서 영국정부가 주는 용맹스포츠상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해서 세인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라인홀트 메쓰너
1944년에 오스트리아의 티롤에서 출생했다. 1978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으로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1986년 로체를 끝으로 히말라야의 8000미터를 완등한 자유등반의 제1인자다. 동생 귄터 메쓰너와 함께 낭가파르밧의 루팔벽 등정에 성공하고 디아미르 벽으로 하산하다가 눈사태에 동생을 잃기도 했다.
저서로 '모험으로의 출발', '검은고독 흰고독',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등이 있다.

예지 쿠쿠츠카
1948년 폴란드의 카토비체 출신 산악인으로 10여년간의 히말라야 등반으로 1987년 티벳의 시샤팡마를 등정함으로써 라인홀트 메쓰너에 이어 히말라야 등정사상 두번째로 8000미터급의 봉우리를 모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알파인 스타일 히말라야니즘을 완벽히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폴란드 스퐅츠맨 인기투표에서 1위로 선정되며 폴란드의 국민적 영웅이기도 한 그는 1989년 가을 로체남벽을 오르던 중 추락, 사망했다.

야마다 노보루
1950년 일본군마현 출신의 산악인으로 1975년 다울라기리 IV을 등방하였고, 1983-1984년 로체와 에베레스트 동계원정대장이기 했으며 1985년에는 K2를 무산소로 등정하였다.
동양인으로는 최초의 8000미터급 완등의 유일한 기대주이도 했으나 1989년 알래스카 매킨리의 폭풍설에 갇혀 잠들었다.

허영호
1955년 충북제원군에서 출생했다. 1982년 마칼루 남동릉 배리에이션 루트를 등정하고 1년 후 마나슬루 단독등정, 2년 후 로체샬 원정 등, 7년 사이에 에베레스트 동계등정과 로체동계등정을 하면서 엄홍길과 함께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의 봉우리를 완등할 것으로 기대를 했으나 현재는 남극점 탐험이나 오지탐험 등 산만이 아닌 다양한 모험을 추구하고 있다.

에라르 로렝땅
1959년 스위스 볼레에서 출생했으며 1982년 스위스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낭가파르밧 등정의 영광을 안아 스위스 히말라야니즘을 지고 나갈 유망주로 떠올랐다.
1984년 4월에 마나슬루 북동릉을 스키로 등정하는데 성공하였고 1985년 아이거북벽 정상에 오른 그의 괄목할 만한 등반은 에베레스트 북벽을 45시간만에 등정을 하산을 한 기록이다.

볼프강 귈리히
1962에 독일의 팔츠에서 출생했다. 하드프리의 선두에 나선 클라이머로 독일 에어라겐 대학에서 스포츠 과학을 전공하였으며 하드프리의 차원을 지고의 암벽등반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화려한 구도자의 한사람이다.
현대 자유등반 최고조의 한계를 찾아 앞서 실천하는 프리클라이밍의 주도자인 그는 영화 '클리프 행어'의 대역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피로로 인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본 란은 신승모씨의 '정상의 순례자들'에서 참조했습니다.

500-757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 전남대학교 제1학생회관 400호
회장 임주희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lpine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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