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남이 쓴글

이 클라이머의 삶

월간 山 2005년 9월호 한필석

몰입의 즐거움에 극한의 세계로 뛰어든다”

2005/09/08 오전 11:42 | 대표폴더

떠오르는 히말라야 거벽등반 스타 이현조씨

올 시즌 파키스탄 히말라야에서 가장 화제를 불러일으킨 원정은 한국 낭가파르밧 루팔벽 등반이었다. 그 원정에서 한국팀은 1970년 독일팀의 메스너 형제가 초등한 중앙립 루트를 35년만에 재등하는 데 성공했다. 그간 12개에 이르는 세계 각국의 막강한 팀들이 재등을 노렸으나, 일본팀의 경우 막판 수직에 가까운 500여m 길이의 바위협곡 구간에서 4명이 실종되는 등 모든 팀이 마지막 난관 직전에서 공포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 험난한 루트를 완등한 이가 이현조씨(李鉉祚?33?골드윈코리아)다.

하산길 환각상태가 오히려 안전지대로 이끌어

“루팔벽으로 다시 내려설 수 없어 반대쪽인 디아미르쪽으로 하산하는데, 외국 산악인 3명이 베이스캠프에서 3시간이나 올라와서 반겨주지 뭐예요. 배낭까지 받아주면서 말이죠. 베이스캠프에 내려섰을 때는 히말라야를 16차례나 원정했다는 외국 산악인이 텐트 문을 열어주면서 푹 쉬라고 하더군요. 저녁 때가 되니까 낮에 마중나온 이들이 파티까지 열어주었고요. 거의 영웅 대접을 받은 거죠. 아마 앞으로도 그런 대접을 받을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100일 가까이 고생한 선후배들과 함께 오르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리더군요. 특히 막판에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등정길이 무산된 동료들에게는 큰 빚을 진 기분입니다.”

35년만에 루팔벽 중앙립 루트 재등의 영광을 전 대원에게 돌린 이현조씨는 하산길에 묘한 환각상태에 빠졌다. 7월13일 밤 10시30분 C4(7,150m)를 출발한 이후 꼬박 24시간 등반을 펼친 끝에 14일 오후 10시50분경 정상에 올라선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산길에 들어섰다.

평범한 능선길일지라도 만 하루동안 걷고 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정상을 향하다 8m나 추락하는 등 8,000m 위아래에서 하루 동안 사투를 벌였으니 정상적일 리 만무. 그렇지만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매서운 바람과 생환에 대한 불안감이었습니다. 때문에 감동이니 뭐니 떠오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내려서다 앞장선 창호형의 발자국을 밟는 순간 눈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판상눈사태였죠. 끝났다 싶더군요. 남들은 그럴 때 살아온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는 저는 우여곡절 끝에 정상에 올라섰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구나 싶은 게 욕부터 나오더군요.”

그는 한밤중에 4,000m 아래 디아미르 베이스캠프까지 곧장 떨어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살아났다.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헤엄치듯 팔을 휘저으며 눈사태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피켈로 설사면을 찍고 빠져나와 정신을 차리자 꼭 언젠가 와봤던 곳 같았어요. 모든 지형이 너무도 낯익고요. 아래쪽에서 불빛이 보이자 일본 산악인들이 불빛으로 우리를 시험하는가 싶더군요. 비박을 결정하고 설사면에서 주저앉았을 때도 전혀 춥지 않고 포근했고요. 동이 틀 때까지 푹 잤을 정도였으니까요. 제2캠프로 내려서는데, 꼭 예쁜 아가씨가 커피 들고 마중 나올 것만 같더군요. 예상대로 누군가 마중나오기는 했지만 커피 든 아가씨가 아닌 오렌지 주스 잔을 든 나이 지긋한 아저씨였답니다. 그런데 제2캠프 아래 대암벽을 내려서고 설원에서 도착하는 순간 갑자기 아주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엄습했습니다.”

그는 긴 시간동안 환각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환각 속의 느낌이 이끄는 대로 방향을 잡았고, 걸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사고를 일으키는 환각상태가 오히려 방향을 잡아주었으니까요. 그런 것을 보면 등반은 분명 실력이 가늠하는 것이지만, 생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표현을 쓰나 보죠.”

이번에 함께 정상에 오른 김창호씨(36?서울시립대OB)는 이현조씨를 “무슨 일이든 덤덤하게 받아넘기는 산꾼”이라며, “전혀 겁을 느끼지 않는 성품인 것 같다”고 평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면을 단순히 성격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역시 많은 고산등반 경험이 뒷받침되었기에 그렇듯 여유 있는 행동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2000년 박영석씨와 함께 한해 8,000m급 3개봉 등정을 기록하면서 뛰어난 고산적응력을 인정받았다. 2001년에는 시샤팡마 남벽 등정 후 하산길에서 크레바스에 추락했다 빠져나와 해발 7,850m의 설벽에서 비박까지 하고도 컨디션이 떨어진 선배 대원을 데리고 내려오기 위해 다시 100m를 올라갔을 만큼 강한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북극점 도보탐험에 도전하는가 하면, 남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해 극지탐험가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 이렇게 고산과 극지에서의 많은 경험이 이번 등반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바탕이 된 것이다.

그가 고산등반을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과 군복무를 끝낸 다음부터였다.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중학교를 마친 다음 광주 서강고에서 고교시절을 보낸 그는 가정형편도 넉넉하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대학에 들어갈 실력도 되지 않자 졸업 후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큰 공장을 짓는 건설공사장에서 배관공으로 일을 했다. 그러나 1년쯤 지나 일이 손에 익으면서 봉급도 많이 받을 수 있게 되었으나 이렇게 지내다보면 인생이 빤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졸업 이듬해 여름 다시 책과 씨름을 시작, 이듬해 전남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너무 힘들다 보니 도피성으로 그만두게 된 겁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자연스레 산악부로 발이 이끌리더군요. 어린 시절 토끼 노루 잡겠다고 뛰어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산에 관심이 있었던 거죠.”

토?일요일이면 무등산이나 월출산 바위에 매달려 지내고, 방학이면 설악산 지리산이다 찾아 20일 넘게 산에서 살고, 백두대간을 타면서 우리 산의 아름다움을 깨닫게도 되었다. 산에 다니기에도 벅찼을 텐데 3학년 때부터는 주중에 적십자 봉사활동에도 열중하면서 적십자사 산악안전지도자와 수상안전지도자 자격증을 따냈다.

시샤팡마 남벽 등반으로 새로운 등반세계로

그는 여리게 생긴 얼굴과 달리 해병 장교 출신이다. 그것도 억세고 거칠기로 이름난 해병 수색대의 소대장 역을 무난히 해냈다.

“졸업 후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해야겠다 생각은 해왔지만, 해병대에 가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학사장교 시험을 볼 때쯤 되자 ‘해병대 생활은 산악부 생활의 연속이며, 스쿠버, 점프, 특수전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해병장교밖에 없다’는 선배의 말에 솔깃해 해병대에 발을 담그고만 거죠.”

엉뚱한 발상이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해병대 체질이었다. 대학시절 백두대간 산행을 통해 갈고 닦은 보행 능력은 천리행군 때 여실히 나타났고, 구박받으며 배운 독도법은 고참 하사관을 능가했다. 게다가 수상안전지도자로서 맹인 수영장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익힌 수영실력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 달에 절반은 산에서 사니 그 이상 좋을 게 없었죠. 그래도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부임했을 때는 황당했답니다. 반년 가까이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아 소대장이 없었을 정도로 규율이 엉망이 소대였으니까요. 그런데 대관령에서 훈련 이후 모두들 저를 잘 따르게 되었답니다. 산중에서 짙은 안개에 갇히자 선임하사라는 사람은 아예 넋을 놓고, 하사관은 하사관대로 고참병은 고참병대로 우겨대더군요. 어떻게 하나 보려고 가만 놔뒀죠. 그랬더니 모두 엉뚱한 방향으로 가서 고생만 하다 원위치하더군요. 그 다음에 제가 나서서 가볍게 목표물을 찾아갔죠. 그 뒤론 제가 하자는 대로 따르더군요. 그러니까 군생활이 재미 없을래야 없을 수 없었던 거죠.”
군생활 중 자신이 바다를 무척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이현조씨는 제대를 얼마 남겨놓고 엉뚱한 결심을 한다. 다른 이들 같으면 곧바로 취직해야겠다 작심할 시기에 그는 5년간은 다른 일에 관심 갖지 않고 대학시절 산악 서적을 통해 키워온 히말라야 설산 등반의 꿈을 실현시키겠다 마음먹었다.

기회는 99년 6월 말 제대 직후 찾아왔다. 올해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영석씨의 마칼루(8,463m) 등반이었다. 3년 넘게 군생활을 통해 닦아왔기에 체력에 관한 한 자신 있었다. 그렇지만, 고산등반이 체력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발 6,000m를 넘어서자 라면만 먹어도 토해버릴 만큼 고소에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해발 7,000m가 조금 넘는 마칼루라까지 고정로프를 깔던 셰르파가 추락하면서 원정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셰르파는 상처도 보이지 않았는데, 목격하자마자 다가갔음에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마지막 마을로 내려가 상게 셰르파를 화장한 다음 다시 올라와 보니 제1캠프가 눈사태에 맞아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요. 등반은 거기서 끝났죠.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상게가 대원을 살려준 셈이나 다름없답니다. 사고가 아니었다면 대원들이 제1캠프에 머물러 있다 눈사태에 당하고 말았을 테니까요. 아무튼 모두들 첫 인연이 중요하다고 하듯이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첫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산을 떠나는 산꾼들 대다수가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껴서인데 제 경우에는 첫 히말라야 원정을 좋은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요.”

고소적응에 약한 편인 김형우 대원(골드윈코리아 과장)은 고소에 적응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오은선씨(영원무역?7대륙 최고봉 완등)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경험 많은 박영석 대장을 통해 고산등반의 ABC를 배울 수 있었다.

첫 고산등반이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본 채 끝났지만, 그 뒤로는 달랐다. 이듬해인 2000년 봄 마칼루 재도전에서 첫 8,000m급 등정을 이룩하고, 여름 시즌 브로드피크(8,047m)에 이어 가을 시즌 시샤팡마 남벽 등반에도 성공했다.

“시샤팡마 등반은 인원을 조정하다 보니 합동등반을 펼친 검악산악회 형들과 정상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칼루와 브로드피크 등반을 통해 고소에 적응된 상태였지만, 검악 형들은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았고, 그래서 고생을 많이 했죠. 저 역시 고생을 안 한 건 아니죠. 하산 중 크레바스에 빠져 위급한 상황을 맞았고, 빠져나온 다음에는 설동을 찾지 못해 해발 7,800m이 넘는 설벽에서 엉덩이를 겨우 깔고 앉은 채 하룻밤 꼬박 지새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전원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등정 이상 기뻤습니다. 비박하고 있을 때 후배들이 의지를 잃지 않게 하려고 베이스캠프에서 야크똥을 주워 밤새 불을 밝혀준 선배들도 고마웠고요. 산에 다니면서 이루어진 인연 중 가장 소중한 인연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현조씨는 시샤팡마 원정 전까지는 박영석 대장을 비롯한 선배들이나 셰르파들을 뒤쫓아 오르는 정도의 등반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나, 시샤팡마 등반에서 새로운 등반의 세계에 눈을 떴다. 알파인 등반, 비박, 루트파인딩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잘 해야 고산등반을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속 지키기 위해 ‘큰 등반과 큰 도전’ 포기

그러나 2001년 1월 아콩카구아(6,959m) 등정 이후 고산 등반에 대해 흥미를 잃고 말았다. 7,000m가 다 되는 고산을 아이젠 한 번 안 차고, 바일 한 번 안 찍고 정상에 올라서자 이런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2000년 전남 지역에서 K2 등정에 성공한 이후 추진한 낭가파르밧 루팔벽 원정에 동참하기로 내정돼 있던 이현조씨는 2001년 여름 동향 선후배들과 루팔 원정에 대비한 훈련 등반으로 알프스 3대 북벽 등반에 나섰다. 그렇지만 이미 세 차례나 8,000m급 고산 정상을 밟아본 그에게 큰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아이거 북벽을 마주하는 순간 모두들 입이 쫙 벌어졌는데, 저는 아무런 흥분이 일지 않았습니다. 북벽에서 그린델발트의 불빛을 바라볼 때 인수봉에서 우이동 불빛을 보는 기분이었으니까요. 큰 산을 오르다 보니 악명 높은 아이거 북벽에서조차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던 거죠. 게다가 거기에는 자만심도 담겨 있었을 겁니다.”

알프스에서 귀국한 이현조씨는 잠시 외도를 했다. 산에 대한 열정이 식으면서 갑자기 바다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바다에서 물질도 즐기고 돈도 벌 수 있는 일로 택한 게 선박을 대상으로 하는 수중 특수용접이었다. 그러나 산만 찾다보니 바다가 그리워졌듯이 바다에서 지내다 보니 산이 다시 그리웠다. 그러던 터에 박영석 대장과 함께 북극점 도보탐험에 나서게 되었다.

2003년 북극점 도보탐험은 맥없이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해 말 시도한 2003-2004 남극점 도보탐험은 이듬해 1월 성공적으로 끝났다. 2004년 1월 남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하고 남극점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나흘간 머물 때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지내는데도 잠도 오지 않고,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이번에 낭가파르밧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등하산 48시간 동안 비박하는 사이 두어 시간 눈을 붙인 것 외에는 등반에 몰입했는데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로 내려섰을 때 너무도 힘이 넘쳤다. 외국 클라이머들이 파티를 열어주는 덕분에 밤늦게 눈을 붙이고 이튿날 저녁에도 정상 공격을 앞둔 외국 클라이머들이 이별이 아쉽다며 또 파티를 여는 바람에 또다시 밤이 깊어서야 눈을 붙였다. 그런데도 다음날 새벽 3시에 눈을 떠 그들의 안전한 등반을 기원해 주었다. 그러자 외국 클라이머들은 피곤하지 않느냐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만족감에 너무나 행복해서 피곤한 줄 모르겠다”였다.

아직 미혼인 이현조씨는 이번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냄으로써 전남뿐 아니라 한국 산악계를 대표하는 히말라야 거벽등반 스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루팔벽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로체 남벽, 다울라기리 서벽, 마칼루 서벽 등 그를 기다리는 거벽들이 히말라야 곳곳에 솟아 있기 때문이다.

“2000년 K2 남남동릉 등정 이후 광주전남 지역의 대학산악부에서는 개별 산악회는 노멀루트 등반을 통해 고산등반의 ABC를 배우도록 하고, 각 대학 리더급들은 따로 모여서 히말랴야에 새로운 길을 찾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K2에 이어 이번 등반의 성공으로 탄력을 받았고요. 아마 다음 번 원정은 마칼루 서벽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현조씨는 무엇보다 약속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루팔벽 등정을 마치고 베이스캠프에 내려섰을 때 외국인들이 빌려준 전화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한 게 박영석 대장이었다. 고산등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준 게 박 대장이었고, 그 사실이 더 없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영석 대장과 인연을 맺은 이후 한 지붕 아래 살다 보니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박 대장이 적극 동참을 권한 2001년 K2 등반과 2005년 북극점 도보탐험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동향 선후배들과 약속한 낭가파르밧 루팔벽 원정 때문이다. 그래서 K2는 훈련 삼아 나선 알프스 3대 북벽 등반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고, 북극점 탐험은 이번 낭가파르밧 원정 때문에 동참하지 못했던 것이다.

‘등반은 목숨 건 게임에 몰입한 후 얻는 성취감’

귀국하자마자 지난해 8월 중순 입사한 노스페이스 제조판매사인 골드윈코리아에 복귀한 그는 요즘 또다시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내년 봄 박영석 대장이 티벳쪽에서 등정을 시도해 네팔쪽으로 하산하는 초모랑마 횡단등반에 나설 계획인데, 이씨의 모교인 전남대산악회에서도 같은 시즌에 초모랑마 원정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이현조씨는 루팔벽 중앙립 루트로 35년만에 낭가파르밧 정상에 올랐지만, 정상에 서자마자 하산할 일이 걱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늘 그랬다. 첫 번째 고봉인 마칼루 정상에서도 그랬고, 브로드피크와 시샤팡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그는 목숨을 건 게임에 계속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등반에 몰입한 후에 얻는 결과물에 대한 성취감은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합니다. 마칼루에 성공한 이후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한 손에 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지냈으니까요. 고산등반 이상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은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