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내가 쓴글

기사

벌거벗은 산
-새로운 전설을 향하여-
한국 루팔 원정대
이현조

히말라야,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신들이 사는곳,또는 신들의 영역이라 부른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능력이나 개개인의 노력보다도 지극히 모호한 개념인‘운’이나 ‘느낌’에 의해서 生과 死가 극명하게 나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 고상돈의 경우가 그렇고 당대 최고의 등반가로 메스너에 비근한 예지 쿠쿠츠카의 죽음이 그렇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해 68일 만에 맞은 호기, 송형근대원을 포함해 3인은 정상을 향해 올랐다.
루트 작업이 최초 예상한 높이만큼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인도 쪽에서 몬순의 조짐을 보이며 다가오는 구름을 보며 더 늦출수 없다는 생각에 각오를 다지고 6월 26일 0시 45분 영하 15도의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출발했다.
하늘은 맑았고 별빛 초롱 초롱 등반 속도가 다소 더딘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았다.
선등자가 올라가고 확보자가 확보를 보는 동안 후미의 등반자는 고스라니 추위와 선등자가 등반중 떨어트리는 낙석,낙빙에 노출된다.
거기에 배고픔과 졸음까지 겹치면 산에 다니느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삼중고를 겪는다.
‘배고프고 춥고 잠온다.’
이는 최악의 상황 다름아니다.
7550m 우리는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얼음벽의 각도가 90도 이상인 곳에서 확보물을 설치하는 동안 천둥소리를 동반한 낙석이 떨어졌다.
영겁과 같은 20초,불확실하게 박힌 확보물에 의지해 등을 두드리고 떨어지는 돌과 얼음에 쓸려 내려가지 않게 버티는 동안 동료의 안전을 포함한 어떤 생각도 할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내 안전이,내 무사함이 확인 되고서야 확보를 보는 송형근대원과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 주우평과김미곤의 안전을 물을수 있었다.
널브러져 있는 김미곤과 그를 향해 하강하는 주우평 그리고 본능적으로 2차 사태를 우려해 정신없이 “하산,철수”를 외치는 친구를 볼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조장인 형근이는 “친구야 픽스로프 확인해라.”.
를 주문한다.
그 줄로 하강을 해야하는 내 안전과 앞으로의 등반을 포기 하지 않는 의지를 보인다.
2차 낙석이 우려되 제대로 부목도 못하고 오른손과 왼다릴 전혀 못쓰는, 더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미곤을 위에서 로프에 묶어 내리고, 한사람은 내려가 당기길 여섯시간,천하장사인 우평이가 설벽에 머릴박는 시간이 길어지고 단단한 형근이가 주져 앉는다.
각자 나름의 상념을 하며 한사람도 자기의 온힘을 쥐어 짜는데 인색하지 않다.
사고 순간부터 우습게도 나는 미곤의 아내를 생각했다.
‘이놈을 두고 가면 평생 욕얻어 먹겠지’
형근은 사고 순간부터 미곤의 똘망똘망하고 참으로 튼튼한 그래서 벌써부터 유아원을 평정한 그의 아들을 생각 했단다.
아마도 우평인 그의 아들과 조만간에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그리 열심이었을 것이다.
폭이 일미터도 안되는 좁은 통로에서 그 순간 우리가 살수 있었던건 운이 좋아서 였고 우리가 베이스 캠프까지 무사히 내려올 수있었던 것은 우리 팀컬러가 끈끈한 정에서 출발한 팀웍이 좋아서 였다.
이러한 낭가 파르밧 원정대는 1999년 K2 남남동릉 등반때부터 이어진 등정주위에서 등로주의로 앞으로의 등반방향을 잡은 광주전남 지역 선배들의 지극한 관심으로 꾸려 졌다.
이 지역 산악인들이 거벽등반에서 기술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2001년 알프스3대 북벽에 원정경험이 없는 후배들을 보내 기량을 연마시키고 이후 로체남벽 등반을 통해 경험을 축적 시켰다.
매 훈련시 참가해 상금을 걸고 훈련을 독려한 위계룡고문과 이지역에 히말라야 원정의 씨앗을 뿌리고 원정대와 함께 베이스까지 동행한 최창돈 고문,류재선단장을 포함 후배들이 원정에 실제 걸림돌이 되는 돈에 구애 받지 않고 등반에 몰두 할수 있도록 도움주고 베이스까지 함께해 고소로 고생한 이현길,박정갑부단장,기상이 악화되 원정대가 침체되어 힘들어할 때 격려차 찾아온 한국도로공사 홍성국부장등 많은 이들이 등반에 함께 했다.
산은 묘한 매력이 있어 특별한 인연이 없던 이들도 피붙이 이상으로 꽁꽁 묶어 버린다.
그래서 이들이 한번씩 다녀 가면 형님들의,선배들의 빈자릴 보며 오히려 한동안 몸살을 앓는다.
광주.전남 지역의 등반력,선배들의 지극한 관심과 기업인들의 보살핌을 받아 꾸려진 원정대는 4월 12일 한국을 떠나 행정처리에 소요된 3일간의 이슬라마드체류후 곧바로 낭가파르밧을 출발 4월 18일 마지막 마을에 도착해 짐을 운반할 포터를 수배하고 고소 적응을 위해 하루를 머물렀다.
폭설로 인한 눈사태로 길이 무너져 짚차가 갈수 없는곳은 격려차 함께 동행한 지역 경제인과 트레커 그리고 현지주민들 도움을 받아 짐을 실은 짚차를 끌고 밀고 로프를 연결해 줄을 당겨서 돌파했다.
길이 무너진 곳은 일일이 돌을 날라 메워 새로 만들어야 하는 수고와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이를 통해 현지인과 낯선 만남이 우호적인 관계로 이어져 원정 기간이 길어 질때 쌀을 포함한 야채 조달을 원활히 할수있었다.
모든 원정대가 겪는 통과의례를 짧고 굵게 보내고 4월 20일 도착한 베이스캠프는 1m 이상의 눈이 쌓여 앞으로 험로를 예견했다.
안락한 베이스 캠프를 위해 쌓인 눈을 걷어 내 맨땅에 텐트를 쳤다.
등반뿐 아니라 작업에 일가견을 갖고 있는 이성원대장은 눈이 녹아 흐를 수로까지 만들어 좀더 나은 베이스 캠프 환경을 조성 했는데 이런날이면 어김없이 눈이 쏟아져 대원들 텐트 눈에 무너지지 않게 지키느라 잠을 잘수 없었다.
1m 이상씩 쌓이는 눈도 다음날 11시가 되기전에 맨땅이 보이게 녹는날이 ,4월 말이 되니 이어졌다.
베이스 캠프 도착 12일째 우린 6090m에 캠프2를 구축해 “이런 속도면 이달중으로 올라가는거 아냐”하는 택도 없는 꿈을 가졌다.
마치 곧 귀국이라도 할 것 같은 자만이 스물 스물 가슴에 차올랐다.
여름 한철 양치기 가족들이 사용하는 두평 남짓한 움막에 주민이 올라오고 더불어 녹색 기운이 완연해 지기 시작한 5월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우린 하늘만 바라보아야 했다.
우리의 자만과 택도 없는 꿈을 꾸짖듯 하늘은 우중충하고 그런날이면 예외 없이 눈을 퍼 부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양을 잡아 낭가 파르밧 여신께 제사를 올리는 날이면 더 폭설이 내리니 참 묘한 일이다.
루트 작업은 ‘지지 부진’,이성원 대장은‘노심초사’가 6월 14일 형근,미곤,우평의 노력으로 해소되 정상을 향한 최소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760m를 오르는데 꼬박 43일이 소요된 셈이다.
눈사태에 대원이 쓸려 부상당하고 폭설로 텐트가 일곱동이 넘게 파손 되고 서야 얻은 값진 결과다.
5월까지 간간히 밤에 영하의 기온을 보였는데 6월엔 5000m이상의 캠프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문제는 추위가 아니고 영하의 날씨에도 지글지글 끓는 태양열이다.
체력을 사정없이 깍아내린다.
너무 더워 옷가지 준비를 소홀히 할라 치면 어김없이 폭풍설이 몰아쳐 방심한 피부를 얼려 동상을 불렀다.
양을 풀어 놓고 할일 없는 양치기들은 좋은 눈으로 우리의 등반 일거수 일투족을 입에 담아 인터넷 전송 속도를 무색하게 주위에 퍼트리고 또 물어 날린다.
다소 과장은 있으나 사실에 크게 어긋남이 없다.
이들과의 축구를 통한 유대감과 한국등반대의 가장 큰 장점인 미추와 그들에게 나는 냄새를 떠나서 항상 보여주는 인간애는 깊은 신뢰를 주어 그들로부터 끊이지 않고 양과 염소의 발효유를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싱싱한 야채와 영양 풍부한 염소와 양을 비싸지 않는 가격에 확보해 등반에 소진된 체력을 보충할수 있었다.
더불어 뚜렷한 근거 없는 믿음 “다 실패 해도 한국 원정대는 성공할것이다.는 소문이 팽배해 기분 좋게 했다.
굳은 날씨,웬만큼 날리는 눈을 일상으로 여기니 등반에 속도가 붙는다.
원정을 처음온 박남수 대원,이번이 두 번째인 김병찬 부대장,로체살 원정에서 고소로 제몫을 못한 박현수등 전대원이 목숨 걸고 하듯 제몫을 다한다.
드디어 6월 26일 정상을 향해 나섰다.
인심을 얻은 등반대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맹신을 가지고…
그리고 이성원 대장의 확고한 믿음을 담은 눈빛을 등에 달고서,더불어 원정 초기부터 “과연 저들이 할 수있을까?”
회의를 보인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한번도 의심치않고 원정을 추진한 단장님,회의론자들의 의구심 보다 더 대장과 대원들을 직접 알고 있는 친인들이 보여주는 진한 성원을 가득 받아서

벌거벗은 산-정상등정
좌향좌!, 우향우!

7월 14일 23시 “대장님 더 높은곳은 없습니다”참 밋밋한 대사다.
베이스 캠프 도착 86일,한국을 떠난지 94일 만에야 올라 감정이 치 솟아 오를만도 하고 무전기를 통해 전해 오는 대원들의 환호와 기쁨이 그대로 전해와 가슴 뭉클할만도 한데 이놈의 바람은 나올라는 눈물도 얼려버리고 감상에 빠질 틈도 주지 않고 내려가라 재촉한다.
영하 22도의 기온과 뺨을 때리는 거센 바람은 남극과 북극 탐험으로 나름대로 추위에 잘 견딘다는 내 자부심도 여지 없이 무너뜨려 버린다.
“2005 한국 낭가파르밧 루팔 대장벽 원정대”의 캠프4 텐트 문을 열고 왼쪽으로 내려 가면 베이스 도착, 85일만에 모든걸 접고 철수다.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우향우를 해야 한다.
오늘이 7125m 캠프4에서 3일째 위로 정확히 1000m를 올라야 하는데 하늘은 어제(7월 12일)와 다름없이 흐리고 눈이 온다.
베이스 캠프에서 원정을 지휘하는 대장님과 교신시 오늘은(7월 13일)날씨와 상관없이 밤 열시에 텐트문을 나서기로 이야기가 끝났다.
하산과 등반 계속은 전적으로 우리 판단에 맏기기로 한다는 말씀과 함께
무전 교신이 끝난 오전 11시 날씨가 호전될 기미가 전혀 없다.
식량은 어제 떨어졌고 물을 만들 가스는 오늘까지 쓸 분량만 남아 있다.
가로의 폭이 500m인 설원에 주우평 대원이 선택한 지금의 텐트 자릴 제외하곤 전지역에 걸쳐 스노우 샤워와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고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캠프4도 이미 위에서 쓸려 내려온 눈에 절반이 파묻혔다.
쌓이면 치우고 걷어내길 몇 번 16시에 마지막으로 한번더 텐트 위와 옆에 쌓이고 붙은 눈을 퍼냈다.
“형,이제 쌓이거나 말거나 이대로 버팁시다.무너지면 오르거나 내려가게”
눈을 털어내며 쓰는 힘도 아까와서다.
‘감’이 좋다.
일기예보에서 이틀 전부터 기상이 호전 될거라 했는데 계속 눈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예보에서 좋은날씨일거라 예상한 마지막 날이다.
그런데도 눈이 오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화이트 아웃이 계속 되지만
여전히 본능이 이야기 하는 ‘감’이 좋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냐는 베이스 캠프와의 교신에서 자신있게 “기다려 보겠습니다.”,“기다려 봅시다.”할수 있었다.
산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개념인 본능과 감을 믿고 따른다.
특히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위력을 발휘하곤 하는데 지금이 그때인 것 같다.
이성적인 판단으론 내려가야 한다.
이유도 충분하다.
베이스 캠프를 떠나 온전히 유지된 텐트는 캠프1 밖에 없었다.
그것도 하루 먼저 올라와 새로 정비한 김병찬 부대장의 노력으로.
나머지는 3~4시간 죽을둥 살둥 네명이 붙어서 작업을 해야 겨우 잠자릴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체력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이유를 들자면 날씨가 몬순때나 나타나는 전형적인 행태를 보인다는것.
보통 마지막 캠프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정상을 향하는데 우리는 3일을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다고 내일은 아니 오늘밤은 확실히 좋아질거라는 보장도 없다.
기타 등등 하산을 종용하는 이유들이 끝도없이 많다.
반면 이 무대포 같은 감을 받혀주는
좋은 징후들도 있다.
하나,우리에 안전과 등정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정성을 드리고 간절히기도하고 있다.(음덕양보陰德陽報를 믿는 나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
둘,벽의 경사도가 심해 눈이 깊게 쌓이지 않고 흘러내릴 것이다 예상(이것은 부분적으로 판단 착오)
셋,화이트 아웃이 생겨도 정상부위가 두드러져 헤매지 않을거라는 자신.
넷,날이 밝으면 베이스 캠프에서 우리의 등반을 관측 가능해 루트파인딩이 어려울시 인도가 가능하다는점.
이정도만 해도 감에 대해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을까
다행히 날씨가 따뜻해 벌거벗고 몸을말렸다.
더불어 눈과 화이트 아웃 사이에 간간히 비추는 반가운 햇살에 내의며 옷가지를 말려 뽀송 뽀송하게 했다.
그리고 취침,일단 출발하면 안전한 지대에 도착하기 전까지 잘수 없다.
그래서 양분을 축적하듯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잠도 축적하고 쉬어야 한다.
안떠지는 그런다고 깊게 잘수도 없었던 눈을 부비고 하늘을 봤다.
“와우! 하늘이 열리고 있다.”
20시 구름에 어둠에 닫혔다 열렸다를 반복하는데 여튼 먹장구름에 눈에 내리는 상황보다 훨씬 호전 된것이다.
등반 준비를 하며 눈은 여전히 밖의 하늘 동정을 살폈다.
22시 30분 예상했던 시간보다 30분 늦게 차한잔 마시고 김창호 등반대장이 선두에 서서 길을 뚫었다.
쌓인 설사면의 눈이 우리 발자국에 따라 깊게 파이고 또 이것이 단면을 자르는 칼과 같은 역할을 해서 밑으로 판상 눈사태를 만들어 떨어졌다.
14일 01시,두시간이면 도착할 린네 초입에 많은 눈으로 30분이 지체 되었다.
깔떼기의 유리관 같은 좁은 통로 선등자가 아이젠과 피켈로 얼음을 찍고 바위를 긁을때마다 낙빙과 낙석이 후등자에게 고스란히 떨어진다.
좁은곳은 1m 넓은곳이 10m 8000m의 산을 오르는데 길이 이곳 뿐이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다.
자그마치 500m 이상을 이렇게 좁은 파이프관 같은 곳을 올라야 하니 조금 다치면 운이 좋구 많이 다치면 평균이다.
새벽 두시반,이전 첫 번째 등정 시도시 김미곤 대원 사고 지점에 도착해 지난번에 들고 내려가지 못한 시계와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챙겨 등반을 계속했다.
낙석과 낙빙속에서도 지난 작업시 설치한 로프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있어 큰 위안이다.
고도 7550m 여기 부턴 안전을 위해 설치한 픽스로프가 없다.
지름 6mm, 길이 50m로프로 서로 연결하고 1970년 이후 아무도 정상에 서지 못한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음이 언 오버행을 지나 설사면 벌써 동이 터온다.
우리가 지금 오른는 곳은 깔때기와 똑 같은 형상이다.
때문에 이곳에 해가 들면 위에 쌓인 눈과 얼음이 쏟아지고 눈과 얼음에 고정된 돌이 기온이 올라가면서 녹아 떨어진다.
지난번 사고 시간은 10시 40분경 앞으로 우리가 오를 길을 생각하면 지금이 다섯시이니 위험에 노출될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에 확보물을 설치하지 않고 연속등반을 해서 시간을 줄였다.
고도 7600m 지점,사람의 흔적이 여기서 끝이다.
언제 였을지 모를 다른 등반대의 로프와 장비들이 바위에 고정되어 있다.
통바위,쉬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다 싶은곳으로 올라서면 잡을곳, 디딜곳이 없다.
저기다 싶은곳으로 가도 마찬가지,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8시 두시간째 50m가되지 않는 바위를 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해 미칠지경 오르면서도 이리 화가 나는데 이를 확보 보며 지켜보는 김창호 등반대장의 심정은 어떨까 싶다.
오른쪽으로 붙었다.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바위를 손톱으로 뜯고 아이젠을 바위틈에 비벼 넣고 올라본다.
손가락이 깨질 것 같은데 바위들이 불안정해 힘껏 잡아 당길수도 없다.
확보물을 박을수 없으니 쉴수도 없다.
불안한 것은, 나 혼자만 떨어지면 되는데 내가 추락하면 그 충격에 확보자도 달고 떨어진다는것.
고소에서는 우리가 암벽하다 실수로 아니면 실력이 딸려 떨어지듯 추락 할수도없다.
나뿐 아니라 한줄에 묶여 있는 다른 사람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당연히 실수도 용납이 안된다.
일이미터 아니 100미터 200미터를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가락 감각이 없어 질 즈음 두다리 딛고 설수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이어서 후등자가 오르고 남은 5m 거리 “형 여긴 형이 오르소”란 말을 하고 손을 겨드랑에 넣고 쉼없이 비볐다.
9시 해가 위쪽 봉우리를 비추면서 돌과 얼음이 쏟아 지기 시작 했다.
낭가파르밧 루팔벽 참 웃기는 벽이다.
빈틈이 없다.
40cm이상 눈이 쌓여 있고 그아래에는 콘크리트 색깔과 그만큼 단단한 얼음이 있다.
그정도 경사에 그정도 강도의 얼음위면 눈이 흘러 내릴법도 한데 온전히 달라 붙어 있다가 딛고 서면 여지 없이 무너지고 미끄러 진다.
그래서 얼음에 쌓인 눈을 긁어내고 타격을 해서 얼음에 바일을 박고 오른다.
눈이 얕게 쌓인곳으 무심코 타격하다보면 바위다.
이러다 보니 시간이 몇배로 들고 그사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오직 작은돌만 작은 얼음덩어리만 맞길 그런 행운이 함께 하길 빌며 올랐다.
고도 7850m 이제 위에서 떨어지는 위험으로 부턴 해방되었다.
넓은 설사면, 첫 번째 시도때처럼 피할공간이 없어 알고도 다칠 위험은 없어 졌다는 의미다.
화이트 아웃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고 루트 파인딩에 어려움을 겪었다.
베이스캠프의 대장님 도움을 받아 대략의 방향을 정하고 선두를 교체 해서 등반, 간간히 내리던 눈이 이제 제법 쏟아진다.(17시)
등반 시간이 길어지자 김창호 등반대장은 비박장소를 찾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말했다.
나는 등반을 계속하자는 생각이고 잠시 의견을 나누고 등반을 계속 진행했다.
모든 것이 항상 나쁘게만 작용하지 않는법.
화이트 아웃과 내리는 눈이 초등자들인 라인홀트 메스너 형제가 겪었던 모든것을 태우는 햇살을 피하게 해준것.
영하의 기온에서 찌는듯한 무더위를 어찌 설명할수 있을까
21시 우리는 남봉과 주봉을 연결하는 능선상에 올라 섰다.
제일 반기는 것이 서쪽에서 불어와서 뺨을 때리는 세찬 바람.
린네 초입에서 얼음에 맞은 무릎이 아리고 추락할 때 부딪힌 엉덩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나 때문에 속도가 한 없이 늦어진다.
오르다 주저앉기를 몇 번 정상이다 싶어 고개를 들면 저만큼 앞에 더 높은 봉우리가 있다.
오르고 보면 또 있고 그 거리가 20m가 안되는 것 같은데 한이 없게 느껴진다.
“현조야 여기다”,“여기가 정상이야”
바람에 정상을 만끽할 여유도 휴식도 없이 23시 “대장님 더 높은곳이 없습니다.”알렸다.
우모복에 품고온 사진기 두개가 모두 얼어 정상에 우리가 묶고온 로프와 협찬사 표식기 그리고 하켄을 박고 하산을 시작했다.
지루하고 화나고 위험한 하산을…

하산-산행의 완성-

국내의 산 뿐 아니라 히말라야 원정을 나가는 이들도 대부분 등반의 완성은 건강하게 집에 돌아옴으로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정상에 서면 어떤 생각을 가장 먼저 하냐는 물음에도 “빨리 베이스 캠프에 내려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 답하는 이들이 많다.
10시 41분 먼저 도착한 창호형이나
십분뒤 정상에 오른 나 또한 다름 없었다.
찐하게 한번 둘이 껴안아 정상을 확인하고 기계적으로 할일을 찾아 한다.
먼저 베이스 캠프에 등정 소식을 알렸다.
영하 22도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게 뺨을 때리고 온몸을 얼린다.
만사가 귀찮아도 해야할일은 해야 하는법.
뭔지 모를 알루미늄 캡슐부터 깃발,하켄,스노우바 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눈에 노출된 바위 위에 고정되어 있다  사진기를 꺼내 정상의 흔적을 찍어본다.
하지만 가슴에 품고 왔는데도 후레시 한방 터지고 랜즈가 열리지 않았다.
이어서 디지털 카메라,역시나 절반쯤 열리다 만다.
이성원 대장이 뭔가 소중한거 하난 남겨 놓구 오는 것이 어떠냐는 무전 교신에 7550m부터 줄곧 우리 둘을 연결하고 온 로프가 생각나 이것보다 더 나은게 있나 싶지만 주저 주저 하면서 내려 놓았다.
사실은 가지고 내려가 십이등분 해서 대원 모두가 나눠 갖고 싶은 맘에서 배낭에 꾸려 넣었었다.
별빛에 희끄무레한 파노라마를 눈에 담고 23시 10분 하산을 시작했다.
쉬이 찾을수 있을거라던 디아미르계곡쪽 원정대의 캠프4를 각자 흩어져 찾았으나 발견할수 없었다.
비박이냐 계속 하산할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우리는 계속 내려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냥 머무르기엔 정상부위에서 추위에 노출된 시간이 길었고 추위도 만만치 않아서다.
루팔벽쪽 만큼은 아니여도 서벽은 많은 눈을 이고 있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것은 보통이고 허리깊이까지 빠지는 것도 다반사다.
어느 순간부터 주위 풍경이 굴절 되기 시작 했다.
밤인데 눈사태나 낙석 낙빙이 있겠어 하는 방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불안정 하게 쌓인 눈이 초래할 판상 눈사태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려 가야 한다는 본능만 남아 있는 상태,창호형 랜턴이 설사면을 사선으로 가로 지르는 것이 보인다.
2000년 10월 시샤팡마 정상 능선 앞서간 대원의 발자국이 설사면을 자르는 역할을 해서 제주도 강성규형이 올라서자 판상 눈사태를 맞는 것을 보았다.
2003년 로체샬 원정대가 비슷한 형태의 눈사태로 두명의 대원을 잃었다.
정상적인 상황이고 낮이였다면 한번쯤 눈여겨 보았을 지형과 설질 이였으련만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이 창호형이 자르고간 단면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눈사태.
“끝이다.”
“이렇게 끝나고 마네.”
“에이 씨벌,좆같다.”
란 욕이 절로 나온다.
난 틀림없이 죽을때 욕하며 죽을거다
너무 허무하고 허무 했다.
그만큼 화나고,죽기 싫다는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50m쯤 앞서 가던 창호형을 추월하고 형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박아!,박아!란 박으란 말야”
란 소릴 한귀로 들으며 열심히 헤엄을 쳤다.
50m를 내려오며 계속 했던 바일을 이용한 제동(영화에서는 그리도 잘 먹히던데)이 판 자체가 떨어져 나가는 통에 씨도 먹히지 않음을 알고부터 헤엄을 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어느순간 내가 실려 있는 판이 속도가 줄었다.
그리고 난 오른쪽 바위 기슭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멈춰 있는 내 곁으로 내 안부를 확인 하기위해 창호형은 오지 않았다.
국내에선 다 팽개치고 왔을 터인데 이미 형도 정상이 아닌 듯싶다.
7800m 지점에서 7700까지 참 빨리도 내려왔다.
눈사태에 쓸리고 잠시후 너무도 낯익은 풍경에 놀랬다.
분명 한번 와본 아니 몇 번이였을지 모를 그러나 너무도 눈에 익은 지형이 거짓말처럼 나타 났다.
형이 오른쪽 바위벽에 붙을때도 그길이 아닌 것 같아 몇 번이나 확인했다
“형 그쪽 괜찮아요?”
“위험해 보이는데.이쪽인 것 같은데요.”
“바위가 좀 지져분해”
란 답이 날라왔다.
형은 형이 생각하는길로 가고 난 내가 익숙한 길로 편하게 내려왔다.
언제부터인가 형의 랜턴이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15m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어 뒤돌아 보니 창호형이 랜턴도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무슨일인가 일어난 것인데 형이 눈사태 이후 내게 오지 않았듯 나도 형에게로 다가가 확인하지 않았다 ‘뭔일 있겠어’하고 가지 않았다. 몇걸음 올라갈 기운이 없었다.
이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우리가 타 원정대의 텐트라 여긴 불빛이 멀지 않아 보여 일단 형에게 “오늘 내려가 쉬었다가 내일 찾읍시다.”
했더니 형도 그제서야 내려오기 시작했다.
얼굴은 피로 범벅이고 걷는 폼이 술취한 사람 같다.
위쪽 바위에서 추락을 먹고 설사면에 구르며 다치고 안경을 잃었단다다.
랜턴을 잃어버린 관계로 형이 바로 앞에 가면 내가 뒤에서 비추며 텐트로 다가 가길 얼마, 거리가 줄지 않는다.
부상 정도가 덜한 내가 먼저 러셀을 하고 창호형이 뒤따르는 한산길 어느순간 형이 오지 않고 외쳤다.
“지금 네 옆에 누구야!”
“지금 누구랑 말해?”
“따라 가지말고 이리와”
누가 있다고 저러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가도 가도 계속 그 거릴 유지 하는 불빛에 지쳐 주저 앉길 몇 번 나도 횡설수설한다.
“저거 일본인들이 빛을 가지고 인간을 현혹하는 실험 하는거야.”
“전에도 그랬어”
이제‘기시감’과 환상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우리 지금 환각 상태 아닐까?”
“우리 지금 환상에 빠진 것 같아”
이럼에도 나는 계속 운행을 했으면 하는 맘이 있었다.
형과 상의후 우린 비박을 결정했다.
시공간의 개념이 모호한 상태 우린 얼마동안 비박을 했는지 모르겠다.
고도가 낮아지고 바람이 죽어 나는 앉아서 잘만 했는데 형은 계속 서서 새벽을 맞았다.
온전한 정신으로 시계를 보니 다섯시
위치는 대설원 중간 하단부,내려온 길 한참 위쪽으로 아홉명이 나란히 서서 정상을 향해가고 있다.
우린 그들을 정지된 텐트로 알았고 그들의 랜턴 불빛을 우리가 방향을 오인하지 않도록 켜 놓은 것으로만 알았다.
거기에만 가면 의사도 있을 것 같았고 당연히 잠시 쉴 텐트가 있을거라 믿었다.
이런 모든 상황이 이전에 분명 경험한적이 있다.
대설원 중간에 있는 바위에 걸친 부서진 텐트 조각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멀리 캠프지가 보인다.
뒤에 있는 창호형과 거리가 멀어지고
형의 절규가 들린다.
“물 한모금,잠 한숨 자고 가자!”
7100m 캠프지,잠을 자면 못일어 날것 같다.
계속 걸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길을 따라서
형도 당연히 따라 올거라 믿고 외국원정대의 텐트를 지나 쳤다.
손에 잡힐 듯 녹색의 초지가 보이고
올망졸망 텐트들 모임이 눈에 띈다.
금방 도착할 것 같다.
절벽위로 보이는 텐트옆에 한 사람이 있다.
기억속의 그 사람은 이쁜 아가씨로 따뜻한 차를 가득 따라 주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다.
대암벽과 그 옆 설벽,해가 들고 기온이 올라가 엉덩이 깔고 내려올만 하다.
속도가 붙으면 바일로 제동하길 몇 번 경사가 완만한 설원에 도착 했다.
우모복 원피스를 벗고 고소내의에 챙이 넓은 카라반 모자를 쓰고 한모금 남겨둔 탱주스를 마셨다.
한모금은 내려올 형을 위해 아깝지만 남겨두고 한시간을 쉬고 일어섰다.
갑자기 너무도 낯선 공간이다.
처음 와 보는곳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전까지의 편안함,낯익음이 다 어디로 가고 생전 처음온곳 그래서 더욱 낯설은 곳에 와버렀다.
발자국이라 여겨 지는 것을 따라 아이스 폴 지대에 들어서 한시간 반을 헤메었다.
어디로 가도 크레바스가 널려 있다.
내려오면서 놓쳐버린 한자루의 바일이 못내 아쉽다.
온전히 두자루를 가지고 있다면 어디에 빠져도 올라올 자신이 있는데 지금은 아니다.
막막함에 뒤돌아 보았다.
바위벽에 눈 블록을 쌓아 만든 다섯동의 텐트가 보인다.
다시 뒤로 시간 반을 되돌아 갔다.
엎어지면 코 다을 것 같은 거릴 쉬어가니 거리가 한없이 늘어진다.
그래도 다행.
캠프1에서 내려가는길 멀리 세사람이 마중 나왔다.
내가 주저 앉으면 휘파람을 길게 불어 격려해준다.
그들이 대장님이고 형근이고 같이온 가이드라 여기며 내려갔다.
대장님보다 날씬하다,형근보다 키가 훨 크다,여자가 있다.
그들이 아니여도 일단 좋았다.
간밤에 정상에 보이는 불빛을 계속 관측하고 내려오는 내 속도에 맞춰 마중 나온 이탈리아 산악인,스위스 여성 등반가,현지 가이드다.
쥬스,콜라,비스켓을 들고 나왔지만
손이 가는 것은 쥬스와 콜라다.
탄산음료가 땡겼지만 오랫 동안 정상적인 식사를 못한 관계로 쥬스를 베이스 캠프까지 나눠 마시며 내려왔다.
마중나온 고마움에 등반에 사용한 카라비너와 하켄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두시간 남짓 내려 오니 80여동의 텐트가 있고 모든 사람들이 입구까지 마중나와‘축하’를 연발하고 서로 악수 하잔다.
갑자기 인간의 언어가 소음으로 다가 왔다.
알아 들을수는 없으나 호의가 느껴진다.
7월 15일 16시 안전한 공간에 많은 음식들이 차려 지고 입과 배는 간절히 그 음식들을 원하는데 2000년 마칼루의 장염으로 고생한 경험이 절제케 한다.
스페인 원정대 대장에게 루팔 베이스에서는 쉽게 마실수 있었던 현지 양젖 발효유‘러시’를 부탁했다.
베이스 캠프가 부산 하더니 7개 원정대 원정대를 뒤져 o.7리터의 발효유를 찾아 왔다.
그리고 형과의 교신,캠프2에 도착 했단다.
어깨통증이 심해 하루를 쉬고 내려 온다는데 어느 텐트가 사용가능한지 알아 달라고 해서 물으니 나를 구경하는
모든 이들이 “서로들 자기 텐트 사용 하란다.”
밤에 깊어 가도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피곤하지 않냐,잠을 자야지 않겠느냐.
는 권유에 내 자신에 대한 충만감을 표현할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My mind is full”
이라 무심결 대답했다.
병찬형 형수가 하얀학이 베이스 캠프를 날개로 품고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16일 창호형이 무사히 내려오고 루팔베이스에서 대장님과 친구가 잠을 자지 안고 올라와서야 그 꿈이 온전히 실현 되었다.
환상과 환각이 메스너나 박정헌씨등의 책에서만 나오는 일로 여겼다.
정헌형은 그일 자세히 기록해 보라 충고 했다.
처음 한동안은 내가 그런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 속칭‘쪽팔려’감추고 싶었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은 지금은 그것도 등반이라 여긴다.

By 이 현조

17,613 replies on “기사”